憑

 

 

 

 

 

 

憑

 

 

 

 

 

겉꺼풀을 감아 맞이한 칠흑의 세상 속에선 언제나 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웅장한 울림이 좋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모두들 그건 고동소리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곤 했으나 아니, 달랐다. 오색찬란 내리쬐는 빛이 얇은 막에 의해 가려지고, 언제나 비단결처럼 반질대는 검은 길이 펼쳐지는 곳. 그곳의 나는 색을 잃은 눈동자를 지닌 채 그 공막 위를 메울 빛을 찾아 떠돌았다. 흑빛은 너무 어둡고, 청록빛은 너무 푸르고, 새하얀 것은 어쩐지 눈길이 가지 않고, 적빛은, 흐드러지도록 찬란한 것이 좋아서. 나는 기꺼이 붉게 타오르는 목함을 향해 걸음을 크게 딛고 넘실대는 붉은 장막 너머로 몸을 던진다. 그래. 어쩌면, 살갗을 베면 이처럼 붉은 것이 배어 흐르니 고동과 같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히 달라. 발끝을 기분 좋게 사부작대는 모래알의 감촉, 폐부를 에워싸는 뜨거운 숨결, 나의 생이 거꾸러지는 찬란하고 아리따운 감각. 가만히 그 온기에 몸을 싣고 있으면 쟁쟁한 울림처럼 누군가 말한다. 어서 나를 찾아오라고.

 

하나, 둘, 태내를 열고 흐르는 물소리가 흐른다. 개울이 근처에 있던가, 아니면 내가 아직 태어나지 못했던가. 가만히 숨을 모으고 귀를 기울이면 문밖에서 산새가 우지디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말소리, 사람 소리, 누군가의 목소리. 이제 일어날 시간이 되었는지도 몰라. 조금 더 이곳에 있고 싶은데.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끝난 거지. 감아 내린 꺼풀을 들어 올리려 눈이라 생각되는 두 개의 구멍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뻥 뚫린 구멍 속에는 새하얀 공막도, 붙들어 새긴 붉은 찬란함도 남아있지 못해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흑암 위에 우리가 서 있었다. 남두에는 내가, 북두에는 네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알곡이 열매를 맺고 허리를 수그리면 머리 위의 둑이 터져 허물어진다. 생명이, 알곡이 휩쓸려 물줄기에 씻겨 내려갔다. 하나, 둘, 셋. 종과 횡을 가르며 북소리가 울려 퍼진다. 산새가 일제히 날아올라 갈채처럼 쏟아져 내리면, 누군가의 곡성이. …

 

손을 뻗는다. 피부가 채 돋지 못해 미숙한 것이 늘어진 것을 붙들었다. 뜨거운 것이 심부를 훑고 생을 에둘렀다. 어긋난 영원과 유한이 새겨진 우리의 첫 숨, 그 위를 뒤덮은 만고불변의 진리 속에서 나는 감히 바랐다. 하나를 둘로 쪼갤 독배를 내게 허락하기만을.

 

 

*

 

 

향 내음이 가득한 검은 당 아래 소란이 일었다. 이곳에서만큼은 부디 얌전히 있으라던 부친의 우려가 닿은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은 때였다. 디디는 걸음마다 사박거리는 백분과 신주 파편들이 나뒹구는 것을 눈으로 좇으니, 그 끝에 서 있을 것이 백지장마냥 하얗게 질린 진림임을 알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온순하단 평을 들었던 쌍생 아우는 글을 읽고 걷기 시작한 때부터 유독 오지항아리나 백분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이 단순히 길하다 여겨지는 백자대호나 간식을 만드는 데 쓰이는 미분에 닿아있었다면 크게 문제 되지 않았겠으나 그의 손길은 늘 위패나 영정이 놓인 유택에 미쳤으므로 아우의 관심은 공공연한 소란을 만들곤 했다. 그래도 어리니까, 요 근래 화장수가 드나들어 젊은 여종들 사이에 백분과 가루가 유행을 탔으니까, 어린아이의 눈에 백분과 백골이 크게 다르지 못하리란 추측을 얹고 백공들은 모왕을 눈을 가려 그 심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하루의 9할을 함께하는 쌍생의 형제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단순히 어린아이의 한철 호기심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을.

“자양!”

때아닌 부름에 백분으로부터 시선을 올리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두 눈이 저 살릴 구원자라도 찾은 양 환하게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크기는 작으나 또렷이 울려 퍼지는 어린아이의 외마디 호명은 마치 그의 곤혹스러운 낯빛을 옮겨오는 신호탄과 같아서. 백분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미간을 좁히면 쿵쿵 북소리와 같은 잰걸음을 따라 날 붙은 시선들이 모여든다. 산산이 부서져 내용물을 쏟아내고 있는 분골함 위, 초라하게 내던져진 이름 없는 신주와 나란히 몸을 붙이고 선 우리. 하나, 둘. 새하얀 백분 위로 검은 시선이 일그러짐에 모골이 송연하다. 고작해야 불호령으로 그쳤으면 좋겠는데. 얼굴도 성격도 뭐 하나 닮지 않은 쌍생이나 그럼에도 형이고 아우라, 뒤로 숨어든 진림 대신 두 손을 내두르며 여느 때처럼 형 노릇을 일삼는다. 태곳적 사당의 백골함을 죄 뒤집어 석산의 별당까지 쫓겨난 것이 고작 하루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러다 당장 내일 짐을 싸 들고 다른 분호를 찾아 떠돌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거기서 분명히 물소리가 들렸다니까. 그래서 잠시 들춰본 거였는데….”

“진림.”

가내 어른들의 호령 앞에 퉁명스레 발을 내미는 진림의 옷자락을 바짝 말아쥔 채 말 허리를 자른다.

“그냥 실수였던 거야,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어설픈 복화술로 웅얼거리자 말간 얼굴의 진림이 아랫입술을 한 자쯤 삐죽였다. ‘네가 잘못한 거잖아.’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래. 그러니까 실수라고 해.’ 이게 벌써 몇 번 짼 데 그냥 잘못했다고 좀 하지. 자양이 드글대는 속을 내리누르며 애꿎은 진림의 옷자락을 쥐어짜고 있으면, 아웅다웅하는 두 형제 위로 눈꼬리가 빼쭉한 피곤한 낯의 종로가 입을 열었다.

“쌍아궁의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첫날부터 그 위엄을 이리 마주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군요. 그것이 누구의 함인 줄 아십니까?”

“…모릅니다.”

볼멘 음성의 진림이 답했다. 냅다 잘못했다 말해도 모자랄 판에. 골 아픈 얼굴의 자양이 웃음을 흐린다.

“죄송합니다. 진림이 어긋나 놓인 것을 바로 두려 한 것인데 손이 미끌린 것 같습니다.”

결국 나서는 것은 빤히 보이는 위언이다. 저들도 알겠지. 조금 전 종로 스스로 쌍아궁의 위명을 익히 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골칫덩이 쌍아궁 왕자 둘이 본궁을 두고 떠도는 이유야 보천지하 모르는 이가 없으니 면박을 주고 내쫓으려거든 빠르게 하기나 하지. 말 없는 종로의 낯을 힐끔대며 자양이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부터 유시의 석반 전까지 두 분께서 이곳 사당을 정리하셔야겠습니다. 주변을 물러 둘 터이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부림꾼을 부르시면 됩니다.”

긴 침묵을 깨고 종로가 말했다. 그 말에 기가 찬 자양은 일순 헛숨을 내쉴 뻔하였으나 가까스로 무례를 참았다. 이곳이 제아무리 석산의 외딴 분호라 하지만 이곳은 신주를 모신 사당인데 감히 부림꾼들이 오갈 턱이 있나. 더군다나 이제야 사시를 지났으니 그 말인즉 중반을 거르란 이야기인데.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예.”

무언가 말을 얹을까를 고민하는 사이 진림이 답했다. 평소엔 굼뜨면서 왜 이런 답은 빠른 거야. 물러나는 문중 어른들의 뒷덜미를 보며 자양이 긴 숨을 늘어뜨렸다.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신주에 이름이 없는 게 이상해서…”

검은 주에 등을 기대고 앉은 진림이 반성 없이 투덜거렸다.

“아까는 물소리가 들렸다며.”

“…그것도 맞고.”

“언제까지 물소리 탓을 하면서 분골함을 깨고 다닐 거야? 더는 쫓겨날 분호가 없을 때까지? 이제 돌아다니는 것도 지치지 않아?”

물소리는 무슨 물소리. 자양의 연이은 타박에 진림이 고개를 수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까는 누가 뭐라 할새 없이 대꾸가 빠르더니. 줄줄이 늘어선 검은 원목 사이로 바람이 얽혀든다. 난분분히 흐트러지는 마루 위로 얼룩덜룩한 연흔이 펼쳐졌다. 움직이는 손길을 따라 모래사장 물결 같은 흔적이 겹겹이 펼쳐지고, 그 물결을 따라 뿌연 분내가 코끝을 간질이는 듯한 착각이 든다. 골분이라 하기에는 지극히 고운 것. 고작 죽은 이의 가루뿐인 이게 대체 뭐라고.

“신주에 이름이 있든 없든 사당에 모셔진 이상 그만한 대우를 받던 조상신 중 하나겠지.”

“…….”

“그러니까 이 이상 사고 치지 마.”

쏴아아-. 고사리손 위, 고봉으로 쌓인 하얀 가루가 조그만 목통에 쏟아진다. 담기는 게 반, 공중에 날리는 게 반. 나풀나풀 흩날리는 뿌연 먼지를 보고 있노라면 이래서야 모왕보단 얼굴도 모르는 조상신의 진노를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온다. 비록 이 하얀 진분이 뼛가루이기보다 걸음에 부서지는 모래알에 가까울지라도.

“대답은.”

“…….”

“진림.”

뾰족한 호명에 바닥을 문지르던 움직임이 멎는다. 공간에 맞는 적막감이 주변을 맴돌고 빼닮은 시선 두 개가 맞닿았다. 바람에 날린 탓일까. 새하얀 분진을 입가 거스름처럼 매단 진림의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알았어.”

“그래. 약조한 거야.”

긴소매를 당겨 쥐고 입가에 묻은 분진을 털어주며 되새긴다. 끄덕이는 진림의 얼굴을 두 눈에 거듭 담았음에도 왜일까. 검은 기와에 엉겨드는 추풍이 소슬했다.

 

 

**

 

 

밝을 때 왔어야 했는데. 검은 기와 위로 우듬지 자락이 부산스레 흔들렸다. 어두운 시야 탓에 우듬지 하나하나가 전부 눈꼬리가 올라선 종로마냥 보여 골이 저려왔다. 더듬대며 단출하게 세워진 검은 외삼문을 디뎌 넘자 신을 신지 않아 드러난 새하얀 가죽 아래로 간질간질 알갱이가 맞붙는다. 점성 없는 새하얀 모래알이 딛는 걸음마다 일정한 폭으로 얕게 패이면, 마치 이곳에 발 들인 이의 흔적 하나 남겨두지 않기라도 하겠다는 양 소슬한 바람이 뒤를 따라 걸었다. 묵직하게 느껴오는 뒤안길의 존재감엔 소리도, 형체도 없겠으나, 나는 때마다 그것으로부터 무령 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함 안에 방울이 담겼는지도 몰라, 아니면 신주 뒤에 풍경이 달렸다든지. 남몰래 이어진 걸음은 새끼줄이 가지런히 걸린 내삼문을 지나 검은 칠을 한 널마루 위를 디딘다. 낯선 무게를 얹은 판자들이 저마다 삐걱대며 소란을 내는 탓에 양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죽였다. 허락 없이 다시 사당에 드나든 것을 알면 누군들 경을 칠 것이 분명했다. 어릴 적에야 어린 호기심과 무지로 적당히 넘길 수 있었다지만 이제는 머리가 커 그런 구변이 통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조심히 떼어낸 걸음을 도막도막 잇는다. 디딘 걸음에 물살을 가르는 놋대 소리가 날 때마다 간장이 타는 기분이 들었다. 내 입을 막듯 나무판자의 입도 막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대낮에 모르는 척 기름칠이라도 해둘 걸 그랬나. 채 뱉지 못한 아쉬운 푸념을 속으로 삼키면 이윽고 눈앞에 새하얀 명주 천이 나부끼는 신실이 드리운다.

더는 사고 치지 말라고 했으면서.

소리 없는 중얼임이 뒤안길로 흩어졌다. 하지만 별수 없는 일임을 안다. 모두가 잠들어 오가는 이 하나 없는 주위를 느리게 훑고, 얼기설기 검게 늘어진 영자와 디딜 곳을 헷갈리지 않도록 걸음에 주의를 기울인다. 여전히 시간대는 아쉽지만 지난 사고로 문중 어른의 눈을 피하려면 별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까끌대는 입안을 한차례 훑고, 바람 없이 나부끼는 명주 자락을 멀거니 바라본다. 들어서려면 저걸 잡아야 하는데, 이 일이 언제고 익숙해지질 않아서. 한참을 머뭇거리며 걸음을 주저하고 있으면 마루 위를 굴러다니는 모래알이 한데 모여 지난 선걸음을 알린다. 그러지 않아도 알아. 볼멘 음성이 마음에 흩어졌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명주를 그러쥔다. 겉꺼풀을 감아 내리고 숨을 들이켜니 쿵쿵, 어디선가 익숙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이걸 일찍이 알았다면 독배를 청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래도. 이윽고 각첨을 드밀면 저만의 만신을 반기듯 천 개의 무령 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지고 물길이 굽이치는 여울 소리가 사방을 메운다. 봐. 들리잖아. 무령 소리가, 북소리가, 흐르는 물소리가. 꺼풀이 파리하게 떨리며 감았던 것을 치뜬다. 바람이 한차례 공간을 휘돌며 폐부에 들어찼다. 검은 기와 아래, 빛 한 점 들지 않는 흑암 속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너를 본다. 가지런히 놓인 신주단 위, 두 눈을 거꾸로 뜬 새하얀 공막의 너를.

 

검고 우묵한 얼굴의 그가, 紫壤이,

목함 속 백분을 입에 물고 입술을 찢어 웃었다.

 

紾林. 이리 와.